<토끼굴로의 초대> _ 2020년 1월 퍼블릭아트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문소현은 작가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불안의 근원과 욕망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가 표면적으로 보고 있는 세상 속에 감춰진 혹은 외면하고 있는 또 다른 원초적인 세상을 수면위로 끌어 올리기 위해 스톱모션, 영상, 설치, 드로잉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그의 작업에서 이 틈을 찾아내고 확장시키기 위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둡고, 낯선 그리고 불안과 욕망이 충만하여 교차하는 기묘한 지점들을 포착해 나가고자 한다. 물론 이는 모두 작가 자신이 끊임없이 떠올리고 지울 수 없는 개인적 취향이 담긴 이미지들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직접 만들어 낸 오브제에서부터, 작가에 의해 발견된 것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화면에는 현관, 라운지, 뜰, 갤러리, 무도회장, 쇼 윈도우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음악에 맞춰 뭔가 말랑하고, 액체가 흐르고, 반들거리고, 반복적으로 춤을 추는 기괴한 형태를 가진 것들을 담아 놓고 있다. 이는 작가가 자신이 소유하는 하나의 집이라는 설정으로 상상의 공간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내밀하고 기본이 되는 공간으로 집이라는 가상의 장소를 설정하여, 그 속에 등장하는 모니터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로 전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부터 복잡한 공간적 연결 고리들이 발생하면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혼선이 생긴다. 하나의 공간으로 설정된 전체 이미지 안에 있는 낱개의 파편화된 이미지, 다시 이를 담고 있는 여러 개의 전체 화면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은 이렇게 여러 채널의 공간들로 확산되었다가 다시 이러한 공간들을 모두 연결해서 실제의 공간에서 시선을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게다가 이는 기본적으로 멀리서 관조할 수 밖에 없는 설치를 하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낱개의 이미지를 보려고 하면 화면에 관객의 그림자가 나타나면서 지워진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에서 작가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는 설치 방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작가 자신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꾸준히 경험하고 있는 개인적인 이미지들을 어떻게 분류하여 보여줄 수 있을지에 접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서 시작된 내밀한 이야기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내서 사람들이 읽어내고, 자신과 동질화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토끼가 천적들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잡하게 굴을 파 놓는 것처럼 계획된 설치 방식으로 나타난다.

결국 전시 제목인 《Hollow Show》에서 알 수 있듯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볼 수 있는 명확한 공간들은 토끼굴의 통로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작가가 의도하듯이 시간의 흐름을 유추하기 힘든 어두운 공간들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렇게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나열함으로써 순차적인 시간성으로 연결되는 서사적 맥락을 모두 분절 시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는 하나로 이어진 복잡한 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에서는 가상의 전시공간이라는 설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다층적 구조에서 드러나는 것이 무엇인지이다. 이 장소들은 중의적인 공간이며, 작가 생각하는 대로 디자인된 이성적인 공간 구성과 함께 직관적인 작업들이 공존하는 서로를 관통하는 장소이다. 그렇기에 이 방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어떻게 연결되는지 찾아내기 힘들다. 그가 이런 공간과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사회적 통념과 학습되어 익숙해진 방향성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한 비정형적인 상태로 남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를 남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들어 그 안에서 자신만이 유영할 수 있는 공간을 획득하고 자기 자신에게 가장 편안하고 자유로운 상태를 찾아내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대상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아니라 보여지는 표면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가 발견해 놓은 의식과 무의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의 연결고리를 찾기 보다는 이러한 경계조차도 인식하지 않고 훌쩍 뛰어 넘어 가로지르며 틀을 끊임없이 흔들기 위한 설치를 보여주고 있다.

생생화화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_ 양지윤

 

빛, 도시, 혀, 고독. 이 단어들은 문소현이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표현해 온 주제다. 작가는 구강, 항문, 성기와 같은 신체의 일부에 배설 같은 행위에 집중한다. 그로테스크한 미감으로 훼손되거나 분절된 인체를 만든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인간을 제 사적 공간에서 조차 내몰고 있다’라는 명제가 제 작업의 출발점이라 문소현은 말한다.

 

2007년 대학 졸업 시절 만든 7분 가량의 흑백 애니메이션 <빛의 중독>을 먼저 살펴보자. 작가는 이 스탑모션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이 되는 공간을 석고 조각 위에 펜으로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 흑백 무성영화의 대사가 소개되듯이, 영상은 ‘그것은 어디를 가나 어느 때에나 나를 발견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곳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다. 그는 컴퓨터 모니터,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네온 사인,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같은 도시 속 빛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건물 안과 밖에 설치되어 있는 CCTV는 그의 모습을 계속 따라 붙는다. 빛은 어디서든 그를 발견하고 강력하게 그를 압박한다. 무력해진 남자는 제 발 밑 작은 그림자에 숨어 짧은 휴식을 취한다.

 

<텅The Black Flesh in the Mouth(2012)> 작업은 보다 구체적으로 ’혀’라는 신체 기관에 탐구한다. 문소현은 이 작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혀를 숨기고 있는 입. 입을 벌리면 들어나는 내부의 우두머리인 붉은 혀. 입과 혀는 음식물을 빨아들이고 갈기갈기 찢고 삼키는 행위를 함으로써, 외부의 것을 자신을 것으로 끌어드린다.”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붉은 혀를 타고 액체 분비물들이 계속 흘러내린다. 영상 속에서 혀는 제 기능을 상실한 채, 근육 덩어리처럼 고기 덩어리처럼 입 안 가득 꿈틀댄다. 이 혀를 가진 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무력하게 혀를 내뱉기만 하는 것이다.

 

30대 중반의 여성 예술가가 도시 속 인간의 소외라는 주제를 외설적이고 음울한 신체로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명화된 사회에 대한 반항을 침과 같은 신체의 잔여물과 혀와 같은 신체 기관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소현의 작업에서 사회의 폐기물과 신체의 잔여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형성되는가.

 

외설적이며 음울한 신체의 일부와 배설물에 대한 묘사는 1970년대부터 있어 온 여성 예술가들의 예술적 실천과 그 결을 같이 한다. 독일 태생의 미술가인 키키 스미스는 1970년대 후반부터 여성의 신체를 소재로 터부시되는 신체 분비물을 적나라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다루어 왔다. 피와 젖, 눈물과 오줌 같은 대상들에 대해 스미스는 “재료들도 그 속에서 생명이나 죽음을 지니고 있는 섹시한 것들이다’고 말한다. 미국의 조각가 로나 폰딕은 1980 년대 초반부터 신발, 젖병, 치아 등 신체를 파편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입(1993)> 혐오스러운 치아를 가진 더러운 입들을 바닥에 늘어놓은 조각 작업이 그 구체적 예가 된다. 루이스 부르주아, 에바 헤세, 야나 스테르박과 같은 여성 조각가들의 실천은 프로이트의 섹슈얼리티 이론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과 구강가학증적 표현을 반영한다.

 

이는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에이즈라는 만연한 질병, 여기에 무관심한 정부의 태도에 대한 예술가들의 항의와 저항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애브젝트 미술>로 명명되는 예술적 실천은 프로이트가 1930년 <문명과 불만>에서 말한 “문명화는 엎드린 신체, 항문, 후각 등을 억압하는 대신 직립한 신체, 성기, 시각 등에 특권을 준다”에 대한 현대 예술가들의 대응이다. 예술가들은 의도적으로 타인이 혐오스러워 하는 항문과 배설물을 과시함으로서 문명화된 복지 국가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문소현의 예술적 실천도 그 결을 함께 한다. 작가는 이성애적 차이의 관습화된 법칙을 비틀고, 그 차이가 모호해지는 항문 세계로의 퇴행을 연출한다. 의도적으로 혐오스럽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대상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여, 이성적인 사회 질서의 가치를 재고해보게 하는 전략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불꽃 축제>라는 연작의 일환으로 <모닥불 주변의 춤꾼과 가수>, <터지는 폭죽들>, <불타는 밤>, <Take the cake>이라는 영상 설치를 소개한다.

서울의 롯데 타워와 서울역 스퀘어, 부산의 모텔, 인천 공항의 기념조각상, 광명 동굴의 조명과 같이 도시의 밤을 밝히는 전광판을 촬영한 <불타는 밤>은 전체 작업의 배경처럼 배치된다. <터지는 폭죽들>은 살충 조명에 벌레가 타 들어가는 장면을 99bpm에 맞춰 편집한 영상이다. <Take the cake>은 케이크에 시럽 따위의 액체가 뿌려지는 과정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한다. <모닥불 주변의 춤꾼과 가수>라는 모니터 타워로 된 조각 작업이 함께 한다. 수직으로 배치된 3개의 모니터에는 실리콘 껍질로 만들어진 여성 신체를 한 인형의 부분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진다. 작가는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만 다룬 8등신 피규어를 사서 이를 실리콘으로 본을 떴다. 입이나 토르소와 같이 신체들은 토막토막 보여진다. 이 영상 타워의 중심에는 붉은 LED 조명을 받으며 치솟는 천이 설치된다.

 

작가는 이 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했던 캠프파이어는 안전상의 이유로 금지되었다. 이는 보다 안전하다고 판단된 LED 조명으로 대치되었다. 가짜 캠프파이어의 불빛이 LED로 구현된 것이다. 무엇이든 구현가능한 새로운 디지털 유토피아.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오는 실상은 진짜를 대체한 가짜, 실체가 아닌 환영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환영, 온라인 환경에 익숙해져 가고, 실존에 관한 본질적 질문들을 잊어간다. 

 

신체를 소재로 한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그 출발을 자서전적 방식에서 찾았던 데 반해, 문소현은 포스트-디지털 환경과 신자유주의 도시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집중하는 인간 형상을 사용한 예술의 목적은 인간주의적 ‘질서로의 회복’이 아니다. 오히려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이라는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그로 인한 무질서함이 만들어낸, 전통적 맥락에서의 인간성이 파괴된 지금의 상황이다. 스펙타클의 사회가 가져온 압력으로 인해, 인간의 경험이 모든 지점에서 뒤섞이게 된 상황을 드러낸다. 문소현의 작업에서는 신체의 구멍에서 토하듯 쏟아내는 분비물의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억압된 내면, 파괴된 인간, 그 형상의 재현물일지 모른다.

 

 

 

 

 

 

낙원 없는 낙원

문소현 개인전 <낙원으로> 2018.11.29.-12.8. 신촌극장    _ 김지연 ( 미술 비평)

 

불빛과 사람들로 가득한 신촌 거리의 모퉁이에 비밀스럽게 숨은 공간, 신촌극장은 깊은 밤의 시간으로 향하기 딱 알맞은 곳이다. 극장 내를 밝히는 조명이 꺼지면 온전한 어둠이 찾아온다. 화면에 조심스레 빛이 등장하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이 타오르다가 이내 알록달록한 빛의 향연이 이어진다. 문소현 작가의 신작 <낙원으로–빛나는 밤>이다.

작가가 채집한 빛축제의 장면들은 오색 조명으로 이뤄진 환상의 세계다. 빛으로 치장한 조형물과 나무들, 색색의 전구로 만들어낸 가짜 동물들이 사방에서 시선을 매혹한다. 아름답고 화려한 유희의 공간,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안하지 않다. 낯선 어조의 나레이션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배경음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균열의 감각을 따라가면 작가가 던지는 질문과 마주할 수 있다.

문소현 작가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그 해소에 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왔다. 그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은 바로 조밀하게 통제된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 진짜 감정을, 삶을,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시를 떠나 자연을 경험하거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려는 것은 모두 그런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들이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실된 본래의 것을 욕망한다. 그러나 자본과 소비에 물든 사회는 본래의 것과 껍데기는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대체품을 내주고, 구조의 통제 속에서 진짜를 구할 길이 없는 우리는 주어진 것을 불충분하게나마 누린다. 원시적 자연 대신 공원에서 질서를 지키며 휴식을 취하고, 실제로 먹거나 여행하지 않고 방송 프로그램으로 대신하며, 바깥세상을 직접 돌아다니기보다 모든 것을 적당히 모아 버무린 쇼핑몰에서 안전한 모험을 즐긴다. 누군가 정해준 방식으로 정해진 감정을 느끼고, 사회 구조의 좁은 틀에 몸을 욱여넣는다. 이런 식으로 깊은 곳의 욕망이 해소될 리 없다.

때문에 문소현의 작품에서는 욕망 해소를 위한 시도가 매번 벽에 부딪히고 실패한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작가는 최근 <2018 경기유망작가 생생화화-생각을 넘어>전에서 선보인 신작 <불꽃축제>에서, 감정과 욕망을 제대로 배출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껍데기만 남은 무의미한 행동들을 반복하는 모습을 일종의 희생 제의와 같이 묘사했다. 작가가 채집한 영상을 편집하고 이를 다면 설치하여 구성한 공간은 모든 것이 현란하게 넘쳐난다. 그러나 욕망하는 몸짓이 과해질수록 욕망은 더욱 해소되지 못하고 끈적하게 들러붙는다. 이러한 대비는 <낙원으로>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낙원으로-빛나는 밤>에 흐르는 나레이션은 존 밀턴의 <실락원>이다. 천국을 묘사하는 내용이 빛축제의 장면과 묘하게 닮았다. 그러나 이곳을 채운 불빛들은 실제의 빛이 아니다. 인간이 꾸민 환상, 인공조명으로 만든 가짜 낙원이다. 생명이 없는 동물들이 미소로 우리를 맞이하고, 살아 있는 식물들은 인공의 빛을 걸치고 욕망의 해소에 봉사한다. 스위치를 끄면 허무하게 사라지는 생명력 없는 공간에서 현대인들은 낙원을 꿈꾼다. 하지만 이 화려한 빛으로 일순간 시야는 채울지라도, 영속적으로 마음을 채우진 못한다. 낙원을 찾아간 곳에 낙원은 없다.

조금 더 아래에 또 다른 영상이 보인다. 섹스토이와 액체괴물, 매직샌드, 인형이나 비닐 등 촉각의 쾌락을 위해 사용하는 물건들이 울퉁불퉁한 천 더미 위에 매핑되어 움직이고 있다. 두 번째 영상 <낙원으로–순한 짐승>이다. 이 물건들은 인간에게 도구로 사용될 뿐,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욕망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욕망을 분출하지만, 그것의 시작도 끝도 전혀 모르는 존재다. 공간의 특성상 바닥에 앉아 관람하던 관객들은 자신의 시선과 같은 높이에서 이 도구들이 꿈틀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빛나는 밤’을 바라보다가 사실은 우리 모두 한 덩어리임을,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휘둘리고 길들여진 우리가 결국 ‘순한 짐승’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고 등골이 서늘해지기에 이른다.

때마침 <빛나는 밤>에서는 분수대에서 강렬하게 분출한 물방울들이 오색빛깔을 품은 채 흩어진다. 문소현 작가 특유의 관능적인 영상이 시각적 아름다움을 폭발시키는 순간이기도 하다. 욕망을 거침없이 분출시키듯 물줄기가 터지고 또 터지고, 마침내 욕망이 모든 세상을 집어삼킨다. 뱃속에 응어리진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거대한 제의이자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애절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의식이 끝나도 영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명이 꺼지고 출구로 안내되면 다시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한다. 낙원을 찾는 이들은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할까.

 

김지연 (미술비평)

 

 

 

 

 

 

 

 

 

뜨겁고 황홀한 잔혹동화, 문소현의 스톱모션

 

강은주(미술사)

 

빛을 피해 달아나는 사내의 공포어린 눈동자

읊조리듯 씹어 뱉어지는 붉은 혀

반복적으로 잘려나가는 창백한 손가락

외마디 비명도 없이 비틀어지는 목

 

스톱모션의 분절된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장면들이 호러무비를 능가하는 아찔한 오싹함을 전해온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바들거리는 사내의 몸짓이, 선연한 핏빛으로 날름거리는 혀가, 찌릿하게 전해오는 상처의 고통이, 비틀어진 목구멍의 막막함이 오히려 내가 살아있다는 황홀한 생동감을 느끼게 하니 말이다.

작가 문소현의 작업은 이렇듯 오감의 팽팽한 긴장감 속으로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독특한 핍진성을 지닌다. 그녀의 허구적인 애니메이션 화면이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인 감각적 동요와 몰입을 불러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허구적 장치 속에 실재적 행위를 혼재하는 기술적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허구적 장치의 주인공은 손 조작이 가능하도록 제작한 작은 인형, 즉 퍼펫이다. 학부에서 조소를 전공한 문소현은 기초 드로잉 작업을 통해 주요 캐릭터의 형상을 그린 후 이를 퍼펫으로 제작한다. 작가는 직접 퍼펫을 제작하는 이유를 “판타지의 창출보다는 실제 살아 있는 인간들의 형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라고 밝히고 있다. 치밀하고도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퍼펫의 다양한 포즈와 행위들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촬영되고 하나의 지속적인 시간의 프레임으로 연결되면서 현실의 단면들을 생동감 있게 재현해 낸다.

스톱모션의 특성상 발생하는 분절된 시간의 간극은 작품의 전개에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효과를 주지만 동시에 실재성을 떨어뜨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작가는 영상 일부에 라이브 액션을 도입하여 조작된 허구에서 현실의 세계로 관람자의 감정 이입을 유도하는 방식을 취한다. 실제 불꽃 위에서 익어가는 붉은 고기 살점을 보여주는 방식이나 허공 속에서 흩날리는 먼지가 천천히 내려앉는 모습은, 관람자가 연속적 시간을 경험하며 사건 속으로 빠져들도록 이끈다. 더욱이 작가는 흑백의 화면 사이로 환하게 타오르는 붉은색의 불꽃을 강조하거나, 지글거리며 타들어가는 기름의 소리를 들려주거나,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육즙으로 미각을 자극하는 방식을 통해 관람자의 보고, 듣고, 먹는 행위적 몰입을 극대화한다. 이와 같은 문소현의 독특한 기술적 프레임은 그녀를 단순한 애니메이터가 아닌 공감각적 효과를 창출하는 테크니션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두 번째는 스토리상의 요인으로 문소현의 작품들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인간 본성의 갈등과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부터 그녀의 작품들은 전혀 연관성 없이 새로운 주제들을 다루는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내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왔다. 빛을 피해 달아나는 남성의 모습을 통해 끊임없이 사생활이 노출되는 현대인의 심리적 불안을 표현한 <빛의 중독>(2007), 소통의 불균형과 언어의 폭력성을 묘사한 <텅>(2012),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폭력성과 가학성을 다룬 <공원생활>(2016)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강박, 그리고 이를 유발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해 왔다.

이 과정에서 문소현의 시각은 사뭇 독특한 측면을 드러내는데, 평범한 일상 속에 내재한 신화적 특성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다루는 소재들은 어디서나 마주할듯한 일상적 풍경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 없이 바라보는 일상적 행위와 기호들은 실상 보이지 않는 힘의 논리와 사회적 모순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가 ‘일상의 신화’라고 표현했던 이 같은 현대 사회의 속성은, 누구나 알지만 애써 외면해 온 우리 삶의 치부이기에 노출되는 순간 더욱 곡진한 공감을 자아낸다.

<빛의 중독>에서 주인공의 고통은 인터넷, CCTV와 같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사생활의 영역을 침해당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텅>에서는 또 어떠한가. “혀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입안의 가득 차 있는 근육을 고기로만 인식하는 인물과 혀를 내뱉기만 하는 입이 굳어져버린 인물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소통의 어려움과 불평등을 보여주지 않던가. 여기서 더 나아가 <공원생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보다 다층적으로 현실을 반영한다. 산책을 하고, 취미를 즐기고, 공원의 동물들에게 선의로 먹이를 주고, 삼삼오오 모여 고기를 굽는 인물들은, 도시 공원이 지니는 레테르에 충실히 반응하여 무비판적으로 여가와 오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현실의 우리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오락적 행위가 얼마나 가학적이며 위험한지 인식한 지 못한 채 기괴한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문소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사회적 약자이거나 소수자라는 것이다. 혀의 기능을 잃어버린 사내는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에서 배재된 약자이며, 공적 감시에 노출된 인물 역시 감시당하는 대상이고, 작은 골방을 안식처 삼아 개인의 안전에 대해 불안해하는 젊은이 역시 주류에서 소외된 인물이다.

이들을 악화일로의 상황으로 접어들게 하는 것은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성이다. 이 두 가지 본성은 문소현의 여러 작품에서 되풀이되는 문제적인 증후이다. 자신의 혀를 씹어 삼키는 인물의 가학적 폭력성이나, 새의 목구멍이 막히도록 사료를 쑤셔 넣으며 조소하는 인간들의 잔인성은 현대인이 겪는 불안과 강박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의 강박적 심리에 대한 묘사는 <너는 나를 떠날 수 없다>(2009)에 등장하는 온갖 물건을 몸에 지니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중년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없애다...없어지다>(2009)에서는 손끝에 생긴 작은 상처에 집착하며 잘라내기를 반복한 끝에 목숨을 잃는 남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불안과 강박의 심리가 현대 사회의 이면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음을, 그리고 이들은 언제든지 우리의 현실을 잔혹극으로 뒤바꿀 수 있음을 폭로한다.

작가는 앞서 판타지적 스토리 창출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으나, 작품의 서사적 구조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너무나 그럴듯한 핍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문소현의 작품은 대부분 기승전결의 일반적인 이야기의 구조에서는 벗어나 있다. 위기의 단계는 있으되 전개와 절정, 결말은 생략되기가 태반이다. 장면 간의 인과적 연결고리는 너무도 느슨하며, 원인 없는 극적 사건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완전한 서사성이 오히려 관람객의 상상적 개입을 유도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분절된 사건이나 화면 사이의 인과적 관계는 관람객들에 의해 다양한 양상으로 재조직될 수 있다.

이처럼 문소현의 작업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일상 속에서 포착하여, 불완전하지만 구체적인 서사적 틀로 그 실체를 전달하고자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문소현은 창조적 스토리텔러로, 때로는 공감각적 테크니션으로 역할하며 인간과 사회 구조의 적나라한 양면을 냉철한 시각과 뜨거운 감성으로 재현해 낸다.

이는 불완전하고 비극적인 시대적 현실에 작가 스스로가 깊숙이 공감하고 몰입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비극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어떻게 치유의 길로 향할지 역시, 우리는 문소현의 작품을 통해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녀가 보이는 것, 그 이면에 감춰진 진실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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